사제와 주교로서 평생을 살았지만 저 스스로 죽음 앞에까지 다녀오니 하느님의 사랑을 얼마나 전했는가, 머리만으로 사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사람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전할 방법을 찾다가 호스피스 봉사를 택했습니다.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을 지낸 이문희(李文熙·74) 대주교가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있다. 이 대주교는 지난달 대구가톨릭병원에서 말기 암환자 자원봉사 기본교육을 받고 지금은 매주 1회씩 10주간 심화교육을 받고 있다. 이 대주교는 교육을 마치면 호스피스 봉사에 나설 예정이다. 대교구장을 역임한 천주교 고위 성직자가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것은 국내에선 유례가 없는 일이다. 지난 15일 대구 대명동 예수성심시녀회 구내 숙소에서 만난 이 대주교는 편안한 얼굴이었다.이문희 대주교는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정치로는 부족한 것 같아 천주교 사제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부친은 천주교 평신도 활동도 활발히 한 이효상(李孝祥·1906~1989) 전 국회의장이다. 프랑스 리옹신학대와 파리가톨릭대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196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그는 1972년 주교가 됐고 1986년부터 대구대교구장을 지냈다
▶75사단 호국시 낭송회▶그대는 아는가/ 이름 모를 땅에 잠들어 계실 이름 모를 용사들을/ 대지를 물들인 그들의 수많은 피와 땀의 의미를…(육군 75사단 김경환 병장의 자작시 〈그대에게 고하노라〉)18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경복대학교 문화관에서 이색적인 시 낭송회가 열렸다. 객석은 온통 초록색 군복의 물결이었다. 이날 행사는 육군 75사단과 문인협회 남양주시 지부가 함께 연 호국시 낭송회였다.장병들은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등 애송시 5편과 자작시 2편을 읊었고, 남양주 문인협회 시인들도 〈참으로 장한 아들〉(이용호 시인) 등 각자의 시 7편을 낭독했다. 이석우 남양주시장도 축사와 함께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낭송했다.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로 시작하는 모윤숙 시인의 작품을 신진영 이병이 비장하게 읽자 강당을 메운 450여명 장병과 시민 100여명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이날 낭송회는 75사단이 지난달 전 장병을 대상으로 실시한 호국시 낭송 경연대회의 마무리 행사였다. 시 낭독은 최우수상(김경환 병장), 우수상(손보길 일병 등 3명) 등 수
▶주식으로 바닥친 인생을 털어놓다. ▶서기관으로 일했던 과천청사 앞에서 막노동할 땐 눈물이… 공직 소중히 여기길▶10일 오후 경기도 수원 농촌인적자원개발센터 강당. 농촌진흥청 공무원 등 120여명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종로에서 스피치(speech·화술) 학원을 운영하는 이강성(李講盛·48)씨가 강단에 섰다.이씨는 원래 공무원이었다. 행시 32회인 그는 농림부 등에서 12년간 근무하다가 주식에 빠져 직장과 가족을 모두 잃었고, 공사장 잡부로 근근이 먹고살다가 화술 강사로 재기(再起)에 성공했다. 이날 강연은 옛 직장인 농림부(농림수산식품부) 직원들의 초청으로 자신의 인생역정을 솔직히 털어놓는 자리였다. 그는 청중에게 공직을 소중히 여기라고 했다. 허황한 꿈을 꾸지 않고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이씨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중3 때 중풍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했다.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7세에 행정고시 32회로 합격해 12년간 농림부 등에 근무했다. 그는 지난 2000년 주식으로 갑부가 되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공직을 박차고 나왔다. 이씨는 사표를 내고 신림동 고시촌에
▶더 낮은곳 살핀 독거노인…장기기증본부 유서 내고 자살 ▶“저는 강동구 암사1동 5층 옥탑방에 살고 있는 가족이 없는 독신자입니다.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분부 회원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나려 합니다. 저의 시신 가운데 모든 부분은 장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증하여 주십시오. 2008년 12월3일 김○○”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 지난 4일 우편물 한 통이 도착했다. 우편물에는 붉은 막도장이 찍힌 김씨(68)의 유서와 장기기증등록증, 주민등록증이 담겨 있었다. 유서에는 ‘월세 보증금 300만원으로 주검을 처리해 달라’는 부탁도 함께 쓰여 있었다.장기기증본부 관계자들은 김씨의 유서를 받자마자 경찰과 함께 김씨의 집으로 찾아갔지만 이미 목을 매 숨진 뒤였다. 경찰은 김씨가 ‘유서 편지’를 보낸 뒤 곧장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암사1동 주민자치센터 등의 말로는, 김씨는 서울 강동구 한 옥탑방에서 홀로 살아온 기초생활수급자다. 어릴 적 북한에 가족을 두고 내려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지금껏 혈혈단신으로 살아왔다. 젊은 시절 한때 건설업체 최고경영자까지 지냈지만 사업확장 과정에서 보증을 잘못 서 전 재산을 잃었다고 한다. 이
대전지방보훈청(청장 권율정)은 3일 오전 이안과병원 4층에 있는 제2자원봉사센터에서 보훈가족 60여명을 초청, 무료 건강검진, 장수사진촬영, 이·미용서비스 등을 실시했다.이번 자원봉사활동은 대전보건대학과 지난해 4월17일 업무협약을 체결한 이후 올해 들어 3회째 실시하는 것으로 대전보건대학 장례지도학과 학생 등 자원봉사팀과 이안과병원에서 60여명이 참여, 고령 보훈가족들에게 혈압·혈당체크 등의 기초건강검진과 안과질환에 대한 검사와 치료를 했다.또 고령 보훈가족들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장수(영정)사진 촬영과 이·미용서비스, 발 맛사지 서비스를 제공했다. (사진=대전보훈청 제공)/
자신의 몸 일부를 기꺼이 희생한 사람들, 그리고 이들의 희생으로 새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 모여 함께 감동의 기차여행을 떠났다. 신장기증인과 이식인이 함께 기차를 타고 ‘가을 소풍’을 떠나는 것. 희망과 나눔을 상징하는 파란색 티셔츠를 함께 입은 이들의 표정은 청명한 햇살만큼이나 눈부셨다. 경제난에 금융위기, 하루하루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살이를 나눔과 희생에서 해답을 찾는 이들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해맑고 행복해 보인다. 아침 7시가 채 되기 전부터 서울 용산역 앞은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18일 철도의 날을 맞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기획한 기차여행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신장 기증인과 이식인들이다. 입가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 함순애(54ㆍ주부) 씨는 “중 3때 뇌막염으로 수술을 받을 당시 ‘날 살려주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인생을 보내겠노라’ 기도했었다”며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마침내 설득해 골수와 신장을 기증하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삶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 속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이 묻어나왔다. 최고령 신장 기증인 권재만(76), 김교순(72) 부부도 있다. 기증 수술을 한 지 16년이
동해에서 참돌고래의 장례의식 장면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카메라에 포착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는 지난 6월 27일 시험조사선 탐구12호를 타고 울산-포항간 해역을 조사하던 중 감포 정자 앞바다에서 숨을 거두는 참돌고래를 다른 참돌고래들이 수면위로 밀어올리는 장면을 발견, 동영상으로 촬영했다고 10일 밝혔다.고래연구소는 시험조사선을 타고 수 백마리의 참돌고래떼를 추적하던 중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3~5마리의 참돌고래가 숨을 거두기 직전인 동료를 수면위로 밀어올리는 것을 2시간동안 촬영했다. 참돌고래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숨을 거둔 참돌고래 1마리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참돌고래의 ‘장례의식’은 막을 내렸다. ▲ 동해에서 숨지기 직전의 참돌고래 한마리를 다른 참돌고래들이 따라다니며 수면위로 올리는 장면.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는 지난 6월 27일 시험조사선을 타고 울산-포항 해역을 조사하던 중 감포 정자 앞바다에서 이 장면을 발견, 촬영했다. /수산과학원 제공이들 참돌고래의 의식적 행동은 고래연구소에 의해 발견하기 전 부터 이뤄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고래연구소는 숨을 거운 참돌고래가 어미에 해당하며 외상이 전혀 없는
▶제4회 전국실버댄스·체조경연대회 전국 각지의 19개 팀 참가 ▶강진청자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지난 13일 강진군 대구면 청자촌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온 실버댄스 체조팀들의 화려한 공연이 펼쳐졌다.이번 전국실버댄스·체조경연대회에는 경기 2, 경남 2, 광주 1, 대구 1, 부산 1, 전남 6, 전북 1, 제주 1, 충남 4개 팀 등 모두 19개 팀 1,600여명의 선수들과 가족들이 청자촌을 찾았다.강진군 보건소(소장 장동욱)주관으로 열린 전국실버댄스·체조경연대회는 7년 연속 대한민국 최우수축제로 선정된 강진청자문화제를 축하하고 노인건강증진을 목적으로 올해 4회째를 맞이하고 있다.전국의 실버팀들의 열띤 경연 속에 65세 이상의 실버들이 보여준 젊은이 못지않은 힘과 정열은 축제장을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었으며 관광객들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또한 대회 중간 중간에 강진중앙초등학교의 스포츠댄스팀, 청자골파워댄스팀, 밸리댄스팀이 화려한 춤을 선보이며 청자축제 분위기를 한층 달구었다.할머니를 응원하기 위해 청자촌을 찾은 충남 논산시 반월 초등학교 송준섭(12)군은 할머니가 건강하고 멋있게 춤을 추니 너무 좋다며 우리 할머니 최고라고 목청껏 응원했다. 이번 대회 대
전 재산을 한남대에 기부한 ‘행상 할머니’와 대학 구성원들의 아름다운 인연이 하늘까지 이어졌다. 행상으로 모은 전 재산을 2004년 한남대에 기부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임윤덕씨(90)가 지난 2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임씨는 자식도, 남편도 없다. 그래서 장례식장은 쓸쓸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임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4일 대전 한국병원 장례식장에는 문상객이 끊이지 않았다. 한남대 총장, 교수, 직원, 학생들이 임씨를 가족으로 모시고 장례를 치르기로 했기 때문이다.임씨와 한남대와의 인연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씨는 2004년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써 달라”며 행상으로 평생 모은 전 재산 1억원을 싸들고 한남대를 찾아왔다. 191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임씨는 1946년 월남해 부산과 대전 등에서 생선장사와 채소장사를 하며 억척같이 재산을 모았다. 1973년 남편과 사별한 임씨는 전 재산을 기부하고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된 뒤 “수백명의 자식(교직원)과 수천명의 손주(학생)들을 얻게 되었다”며 행복해 하기도 했다. 한남대는 임씨의 기부금으로 ‘임윤덕할머니장학금’을 만들고 퇴행성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임씨를 대전 어
의로운 일을 하다 세상을 떠난 아들 몫으로 나온 보상금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아버지가 있어 화제다. 경북 안동시에 따르면 최근 안동에 사는 박찬용(49.농협근무)씨가 안동시 장학회에 5천700만원을 보내왔다. 이 돈은 박씨의 아들이 의사자(義死者)로 결정되면서 정부로부터 받은 위로금. 박씨의 장남 준우군은 중학교 3학년생이던 지난 2003년 8월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 낙동강에서 물놀이 도중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었다가 친구만 살아나고 자신은 목숨을 잃었다. 평소 정의로운 성격의 준우군은 학교에서도 어려운 친구들을 곧잘 도와주는 학생이었다. 결국 준우군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친구를 구한 사실이 인정돼 정부로부터 의사자 지정과 함께 5천만원의 위로금이 지급됐다. 아버지 박씨는 그러나 아들 또래 학생들을 보면서 먼저 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위로금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던 중 최근 안동시가 장학회를 설립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장학기금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말 없이 죽은 아들의 위로금을 쾌척했다. 5년이 지나면서 이자가 붙어 위로금은 어느 새 5천700만원으로 불어 있었다. 박씨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하늘이시여... 나의 사랑이 한번의 윤회를 거쳐다시 한번 만 지금의 그 사람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도와 주소서그 다음 생은 미물로 태어나 잊혀질 지라도 아직도 못다 한 사랑이 있으니다시 또 한번의 삶으로아낌없는 사랑 주고 숨 거둘 수 있게 하소서 그 사랑 약속하실 수 있으시다면내 가슴에 깊이 묻어두고 기꺼이 숨 거두리다 가슴을 도려내는 마음으로 하늘을 빌어 이렇게 두 손모아 기도 드리니앞으로 살아 갈 날들을더 사랑하며 그 사람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도와 주시고 그것이 여의치 않아하늘이 나의 삶을 거두어 간다 할지라도다시 한번한 사람의 사랑으로 태어나완성되지 않은 사랑의 詩를 노래하게 하소서
●“53년만에 찾은 아버지… 묘소 지켜드릴래요” ●한국전쟁서 전사한 아버지 곁에 머무는 캐나다인 레오 드메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데 53년이 걸렸습니다. 너무 늦게 찾아 오래도록 옆에서 모시겠습니다.” 현충일인 6일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의 한 묘비 앞에 은발의 한 중년신사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캐나다인 레오 드메이(55). 그는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묘비를 어루만졌다.50여년간 잊고 지냈던 생부 ‘앙드레 아델라드 레짐발드’의 묘비다. ●태어난지 보름만에 의사 집안에 입양레짐발드는 1952년 9월5일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두 달도 안 돼 전사했다. 당시 나이 20세. 이 와중에 드메이는 태어난 지 보름여 만에 의사 집안에 입양됐다. 그의 아버지는 파병 당시 어머니와 약혼한 상태였다.드메이는 이후 양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고, 공직생활을 하며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생부에 관해서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잊고 지냈다. 2년 전 어느 날, 캐나다에 살던 그에게 입양기관에서 전화가 왔다. 친어머니가 그를 찾고 있다는 전화였다. 친어머니를 만난 그는 아버지의 이름과 그가 한국전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生父와의 질긴
●손자, 손녀들은 할아버지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줄로 서서 비석에 묻은 새똥과 솔가루를 털어내고 황사먼지를 정성스럽게 닦는다. 박자에 맞추어 한계단 한계단 내려오면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비문을 읽어주고, 자녀들은 비문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순국지사, 배위, 부군의 뜻들을 이해한다. 대전새중앙교회(담임목사 이기혁)의 교인들과 섬기는 사람들로 구성된 4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6년째 매년 현충일을 1주일 앞두고 이 곳 현충원을 찾아 3대가 함께 하면 더 행복해요를 주제로 현충원 비석 닦기를 펼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 4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26일 애국지사 2. 3묘역 1800여기를 닦으며 3대가 함께 애국심을 선양했다. 올해에는 특히 조치원 지구촌교회와 대전 산성동에 위치한 한빛고등학교에서 지도교사와 학생들 25명이 합류해 비석 닦기 행사에 동참했다. 이기혁 담임목사는 매년 점점 더 많은 단체들에서 합류의사를 밝혀와 이제는 비석 닦기 행사가 우리 지역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라며 더 많은 지역민들이 나라사랑과 호국정신,순국선열의 뜻을 기리며 자녀들과 함께 애국심을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매년 초등학생 아들, 딸을
♥교장선생님, 정년퇴직하지 마세요. 그냥 우리랑 놀아요 ♥우리 교장선생님이 정년 퇴직하지 않게 해주세요.♥스승의 날을 앞둔 지난 9일, 서울시교육청에 이상한 민원이 하나 들어왔다. 민원인은 서울 가회동 재동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 476명. 40년간 교직에 몸담고 올 8월 정년퇴직을 앞둔 이재중(62) 교장의 임기를 연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민원 아이디어를 낸 것은 이 학교 6학년 학생의 학부모인 최미자(49)씨와 몇몇 학부모들이었다. 학부모들은 한 학년에 3개 학급으로 학생 수(550명)도 적고, 도서관 하나 없는 110년 된 낡은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킬 때만 해도 사립학교를 보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4년 전 이 교장이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 한 학기가 지났을까, 아이들 입에서 교장선생님 자랑이 쏟아졌다.♡교장선생님이 학교 가는 길에 나와서 인사해 주세요.♡오늘 교장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우리 교실에 와서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어요.♡교장선생님한테 줄넘기 같이 하자고 했더니, 50개나 하셨어요. 학부모들 사이에서 대체 교장선생님이 누구시기에 하는 궁금증이 커가면서, 맞벌이 엄마들도 짬을 내서 학교를 찾기 시작했다. 허름한 차림으로 운동장 휴지를 줍
좋은 직장,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극빈 환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한국의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이 18일 오전 4시에 별세했다. 향년 63세. 선우 원장은 노숙인과 극빈층을 상대로 20년 동안 무료 진료를 해왔다. 자신은 돌보지 않은 탓일까. 그는 지난 2005년 위암 판정을 받은 뒤 3년 동안 병마와 싸우면서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했다. 투병생활 중에도 1주일에 한번씩은 병원에 들렀다. 그는 “진료는 못하지만 자원봉사자들과 환자들이 원장이 죽었나, 살았나 궁금해 할 것 같아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병세가 악화하면서 뇌사상태에 빠져 서울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1969년 가톨릭의대를 졸업한 선우 원장.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킹스브룩 주이스 메디컬센터에서 3년 여간 열심히 공부한 끝에 당시 미국의 저명한 병원들로부터 좋은 일자리들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뿌리치고 귀국했다. 고국에 돌아온 뒤 한림대병원 의과대 교수로 잠시 근무했던 그는 1983년 당시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였던 관악구 신림동에서 무료 의술 봉사를 시작했다. 1987년8월 서울 영등포 역사 뒤편 ‘쪽방촌’에 요셉의원을 개원했다. 그는 평생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