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우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는, 자신의 주위 사람들 중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때 정도인 것 같다. 사실 우리 주위엔 언제나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애써 죽음을 ‘특별한 이벤트’처럼 취급하며 ‘살아 있는 동안은 죽지 않는다’는 모순된 공식을 세우고 있는 듯하다. 작년 말 어머니와 함께 장사익 소리판에 갔는데, 삶과 죽음을 허심탄회하게 노래하는 그답게 상여소리를 배경으로 한 무대가 인상적이었다. 장사익이 부른 노래 중에는 서홍관의 <무덤>에 곡을 붙인 것이 있었는데, “뒷산을 오르다 동그란 무덤 잔디 위에 누워보았네. 모든 것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이 더 없이 편안해 보였는데…” 라는 구절이 가슴에 박혔다. 무덤은 누군가 생을 살다 마감하고 남겨진 육신을 뉘이고 쉬었던 곳이다. 무덤은 걱정이나 괴로움, 조급함이나 두려움, 차가움이나 어두움, 슬픔이나 외로움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을 다한 육신이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는 편안함의 이미지가 더 어울리는 장소다. 내게 죽음의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나 역시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주위에서 젊은 사람이 왜 죽음을 생각하느냐고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접한다. 살 날이 창창한데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뭔가 비관적이고 패배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오히려 내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고 느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너무 짧은 삶, 마지막이 있지만 예측할 수는 없는 삶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세계에서의 삶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조급해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단 삶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평범할 수도 있는 하나의 인생일 뿐이지만 반짝이는 유리조각처럼 빛나는 순간들을 포착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인식한다는 것은 삶을 아깝게 여기고 충실하게 채우는 것이기도 하면서 반대로 삶을 가볍게 여기고 비우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삶 자체이며 일상과 같다고 생각하게 되면, 살아나가는데 조금씩 여유가 생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데, 사람들은 마음의 공간이 있을 때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고 타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때로 내가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건 사람들 마음에 공간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피붙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협소해서, 자신의 울타리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헌신적일지 몰라도 그 바깥의 수많은 타인들에게는 무심하고 이해관계에 따라선 잔인해질 수도 있다. 솔직히 돈이 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무서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세상은 나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타인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마음의 여유는 바로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 죽음에 대한 나의 가치관이 이 질문을 자주 맞닥뜨리게 한다. 마음을 비울수록, 타인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내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죽음이란, 태어남보다도 더 가치가 있고 삶처럼 가까우며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생각을 진척시켜 나아갈 만한 주제이다. [일다]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