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조선 최고위 사대부가의 장례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기가 최초 공개됐다. 연안김씨 의민공종회 김종진 회장은 2일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어머니인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노(盧)씨의 장례절차를 자세하게 기록한 "광산부부인 노씨 장례일기(光山府夫人 盧氏 葬禮日記)"를 공개했다. 김 회장이 문중에 전해 내려오던 문서 가운데 발굴한 "장례일기"는 1637년 광산부부인 노씨가 사망한 뒤 장손 김천석(1604-1673)이 노씨의 장례 절차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노씨의 장례는 조선시대에 국장 다음가는 장례인 예장(禮葬)으로 진행됐는데 초상에서부터 장례를 모시고 제(祭)를 올리는 날까지 95일이 걸린 대규모 행사였다. 김천석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김래를 대신해 상주가 됐는데 문상객들의 명단과 부의(賻儀) 기록 및 제문 등 다양한 기록들을 낱낱이 남겼다. 김천석의 일기에 따르면 습(襲)에 사용한 의복에는 짙은 초록 비단 저고리 1점, 짙은 초록 명주 작은 저고리 1점, 백화 명주바지 1점, 대홍단 큰 띠 1개 등이 들었다. 또 관의 가격은 포목 30필이 들었는데 호조에서 담당했고 역량(役糧) 10석과 빈 가마니 50포는 강원도에서 맡았으며 제수미 50석 등은 충청도에서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만사(挽詞)" 항목에는 추모사를 모았는데 영의정 이홍주, 예조판서 한여직, 이조판서 이현영, 대간 이목, 대헌 서경우, 좌승지 허계, 충청감사 정태화 등 당대 최고 실력자들이 예도했다. 광산부부인 노씨는 광해군 때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당해 남편과 자식, 사위까지 잃는 화를 입고 제주도로 유배됐다. 당시 노씨가 생계유지를 위해 빚었던 대비모주는 오늘날 막걸리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인조반정으로 환경한 노씨는 81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김 회장은 "문서 자체도 최초로 공개됐지만 땅을 파는 절차에서부터 누가 조문을 지었는가에 이르기까지 400년 전 예장(禮醬)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