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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 관습, 실제로 있었다

  - 현 성 원(연변조선족예의연구회)


《고려장》무덤군, 연변 화룡현(和龍縣)  팔가자(八家子)에 있었다.


고려장(高麗葬)》이란 부모가 늙어서 일할수 없게 되면 산속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부모를 버려 두었다가, 죽게 되면 장례를 지냈다는 전설속 고려인들의 장사 풍속으로서, 오늘날에는 늙고 쇠약한 부모를 부양하지 않고 유기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이 《고려장》과 관련하여 두가지 판본의 전설이 있다. 한가지 전설에서는 한 농부가 자기 부친이 늙고 일할수 없게 되니 그를 지게에 담아 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땅굴을 파서 가두어 놓은 후 지게마저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그 농부의 어린 아들이 그 버린 지게를 도로 가지고 가자고 조른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시면 역시 이 지게로 져서 버려야 하는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농부는 크게 뉘우치고 늙으신 자기 부친을 다시 집으로 모셔 내려와 지성으로 봉양했다고 한다. 이 전설에 근거하여 한국에서는 1963년도에 김기영 각본, 감독으로 된 《고려장》이란 흑백영화까지 나온 적이 있다.


또 하나 전설에는, 한 선비가 당시의 풍습대로 늙으신 자기 어머니를 버리려고 산에 업어 갔는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자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 갈때 길을 잃을까봐 걱정되어 나무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 놓았다. 그 선비는 이렇게도 인자하신 어머니를 차마 버릴수가 없어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러던 어느날, 당나라 사신이 똑같이 생긴 말 두필을 가지고 와서 고려의 대신들더러 어미와 새끼를 가려내라고 하였다. 아무도 가려내지 못하는데 그 선비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그 말들을 하루 굶긴 뒤에 여물을 주어 먼저 먹는 놈이 새끼이고 양보하는 놈이 어미라고 알려 주어 문제를 풀수 있었다. 그 뒤로 조정에서는 늙은이들에게는 젊은이들에게 있을수 없는 귀한 경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영을 내려 늙은 부모를 버리는 악습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전설《고려장》은 우리민족의 수치라고 여겨져 고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따름이고 실제 역사적 사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전설은 결코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 전설《고려장》 원형이라고 의심 할만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조선왕조실록》세종 44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4월 4일(기묘)세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구습의 오점을 고치고 인효의 풍속을 이루게 하라고 예조에 교지를 내리다>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사람의 자식으로 부모가 살았을 때는 효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는 것은 천성(天性)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직분(職分)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외방(外方)의 무지(無知)한 백성들이 부모가 죽으면 도리어 간사한 마음으로 즉시 그 집을 헐어버리고 또 부모가 거의 죽어갈 때에 숨이 아직 끊어지기도 전에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 비록 다시 살아날 수가 있더라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장사 지내는 날에는 향도(香徒)들을 많이 모아서 술을 준비하고 풍악을 베풀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이 하니, 어찌 유속(遺俗)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는가. 아아. 사람은 진실로 각기 상도(常道)를 지키는 천성(天性)이 있으니 누가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리요마는 다만 오래도록 습속(習俗)에 젖어 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지금부터는 유사(攸司)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교조(敎條)를 명시(明示)하여 가가(家家)로 하여금 구습(舊習)의 오점(汚點)을 환히 알도록 하여 자신(自新)해서 인효(仁孝)의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다. 만약 혹시 고치지 않는다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은 엄격히 금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알수 있는바 옛날 고려인들의 장사풍속에는 거의 죽어 가는 부모를 아직 숨을 거두기 전에 외사로 옮기는 풍속이 있었다. 외사란 본채 바깥에 있는 사랑채로 인식할수도 있고 또 다른 어디에 특별히 마련해 놓은 자리일수도 있는데 땅굴이나 돌무덤도 외사로 인식할수 있다. 이 풍속이 전설《고려장》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옮겨가는 대상이 일반적인 늙으신 부모가 아니라 거의 죽어 가는(다시 살아날 수가 있을수도 있는) 부모라는 점이며 공동점이라면 옮겨가는 대상이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로부터 세종대왕께서 교지에서 질책하신 《고려 말기 외방의 무지한 백성들》의 장사풍속이 바로 《고려장》의 유속일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전설《고려장》과 비슷한 장사 풍속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진짜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고려장터》라고 불리우는 곳이 진짜로 있었으니 바로 중국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팔가자(八家子) 상남부락 북쪽에 있었다. 필자가 바로 팔가자 태생인데 문화혁명 전까지 팔가자는 서성향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전향적으로 운동대회를 열거나 어떤 축제가 있게 되면 팔가자 사람들은 명절차림을 하고 도보로 근 10리길을 걸어서 서성으로 갔었다. 전반 구간의 큰길에 꽃의 흐름처럼 기다란 장사진을 이룬 그 장면이 참으로 가관이였다. 상남마을에서 길을 따라 북쪽으로 금방 벗어나면 길 양옆에 풀속에 묻힌 황페한 돌무덤군이 나타났는데 우리는 어른들로 부터 그곳을 《고려장터》(高麗葬地), 혹은 《고려장군묘지》(高麗葬群墓地)라고 익히 들어 왔었다. 그곳의 돌들이 모두 타지에서 옮겨온 돌이 분명함에도 엄청나게 커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어린 소견에 힘이 엄청 센 고려장군들이야 이까짓 돌을 공기돌 다루듯이 하면서 적들과 싸웠을 거라고 상상도 해 보았지만 후에야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최근에 우연히 팔가자의 그 돌무덤군과 관련된 재료를 접하게 되였는데 당시의 기억들이 생생히 떠 오르며 금방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으니 바로 전설《高麗葬》이 실제 역사 사실일 수 있으며 어쩌면 그 유적지의 하나가 곧 바로 팔가자의 그 돌무덤군일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그 돌무덤군과 관련되는 전설도 대체로 우리의 《高麗葬》 전설과 비슷하였다. 즉 부모가 60이 되면 그곳에 돌무덤을 쌓아놓고 부모를 돌무덤 안에 모시고 먹을 것을 조금씩 공급해 주는데 열악한 환경때문에 부모는 얼마 못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큰 돌로 돌무덤을 봉해 버리고 장례를 지냈다고 하였다. 그 고려장터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5키로 되는 곳에 바로 한때는 발해국(기원698년~926년)의 首都로 까지 되면서 흥성했던 중경현덕부 엣터가 있다. 당지에서 《북고성》이라고 불리우는 그곳의 주위에는 지금도 당시 왕궁 성곽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지금은 이미 국가적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1964년에 중조(中朝)고고(古考)연합시찰단이 팔가자 돌무덤군과 그 주위의 유적들을 답사한 적이 있으며 1973년에 연변박물관과 화룡문화관 연합으로 이 돌무덤군을 상세히 답사한 적이 있다. 역사 유적지 자료에는 이곳이 《북대무덤군》으로 명명되어 있는데 발해 때의 것으로 이미 확실하게 고증이 되었다. 그렇다면 발해 때의 돌무덤군이 고려와는 어떤 상관이 있었기에 《고려장터》라는 이름을 가졌을가? 이 돌무덤군은 발해국 고구려 후예들의 무덤들일수 있다. 당시 발해의 주류 족속은 말갈인이라고 하였으나 인구 대부분의 백성들이 고구려 후예들이었다는 것은 이미 상식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북대무덤군》에 관한 답사 자료를 살펴 보노라면 역시 흥미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즉 상세한 답사기록이 있는 쉰 네자리 돌무덤에서 열 네자리 돌무덤의 남쪽벽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를 냈다는 점이다. 이미 사망한 사람을 일차적으로 안장할 시에는 위로부터 유체를 무덤안에 넣으면 되는건데 하필이면 통로를 낼 필요가 무었이었겠는가? 무덤에 통로를 냈다는 것은 평소에 무덤안을 드나들 필요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안장 초기에 그 무덤안의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며 무덤안의 사람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통로였을수도 있었다. 바로 전설《고려장》 특징과도 대체로 부합되는 해석이다.《고려장》이 실제로 있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탄생 원인도 평가해야 하는데 반드시 그 당시 역사적 환경을 이해하고 그에 기준하여 분석해야 할것이다. 그 당시는 해마다 전란으로 정세가 몹시 불안정 하였고 먹을것은 극도로 결핍하였으며 장정들은 대부분 군대에 뽑혀가 끝없이 남정북전 해야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감안할때 《고려장》을 어쩔수 없이 택하게 되었을 당시 사람들의 처지를 어느정도 이해할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쉰 네자리 돌무덤에서 열 네자리 돌무덤에만 바깥통로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장》이 결코 고구려 후예들의 보편성 풍속이 아니라 특수한 경우의 특수현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돌무덤의 규모로 보아서는 상당한 인력과 재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단지 생활 형편이 어려워 늙으신 부모를 버리게 되었다고  단순하게 평가할 문제는 아닌 같다. 1980년도 전까지 이 고려장터는 보존이 괜찮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혼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부분 자리는 이미 논밭으로 되어 버렸고 남쪽 에는 팔가자 임업국 직원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 앉아 있으며 돌들은 몽땅 아파트를 건축하면서 주춧돌로 이용되었다.

-현 성 원(연변조선족예의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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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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