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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투쟁과 승리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전날 오후 7시에 하얼빈역에 잠입했으며 이토는 저격전 30분간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과 기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에 당시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09년 11월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The Singapore Free Press and Mercantile Advertiser)는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일부 새로운 사실들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신문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10월26일 장춘에서 기차를 타고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당초 이토는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걸어가다 저격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신문은 코콥초프가 열차안에 들어가 이토와 30분간 대화했다고 보도했다. 대화를 마치고 이토는 열차앞에 기다리던 러시아와 중국 영사 등의 영접을 받았다. 이어 도열한 러시아와 중국 군인들을 사열을 받았고 양 옆에는 코콥초프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가 있었다. 일본 남만주철도 사장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是公)와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등 수행원들이 뒤를 따랐다.


이토가 일본인 환영단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돌연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회색 양복차림에 모자(shooting cap)를 쓴 23세의 한국인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7연발 리볼버권총으로 불과 5피트(약 1.5m) 앞에서 3발을 이토의 가슴과 복부를 향해 쏘았다. 곁에 있던 나카무라 사장이 쓰러지는 이토를 잡았다. 이토는 “내가 당했어”라고 신음을 토했다. 차츰 안색이 창백해진 이토는 급히 열차안으로 후송됐다. 그곳에서 이토는 “누가 쐈나? 모리(비서관)도 맞았나?”하고 물었다고 전했다.


몇 분 뒤 그는 의식이 혼미해졌고 결국 30분만에 사망했다. 싱가포르 프리프레스에 따르면 안중근의사는 9시30분경 저격을 감행했고 이토는 10시경 숨진 것으로 파악된다. 결정적 사인은 오른쪽 폐를 관통한 것이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저격후 세발을 더 발사, 옆에 있던 가와카미 총영사의 오른팔을 맞췄고 남만주철도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이사는 오른발을, 모리 비서관은 오른팔을 맞춘 것으로 나타났다. 안중근의사가 대한독립군 참모중장으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군인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이토를 정확히 조준 사살했으며 나머지 세발도 일본인사들만 겨냥,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하는 등 놀라울만큼 침착성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저격자는 현장에서 붙잡힌 후 전날 오후 7시에 겐산과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하얼빈에 들어왔으며 이곳에 온 목적은 수많은 한국인들을 살해한 이토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면서 “그는 체포직후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으며 두려움의 빛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을 하기를 거부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기사자료를 발굴한 재미언론인 문기성씨는 “안중근의사의 나이를 실제보다 8살 적게 표기하긴 했지만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이토가 저격직전 코콥초프 장관과 열차회담을 가졌다는 사실과 죽기 직전 남긴 말, 4명이 어떤 부위에 총을 맞았다는 내용, 안중근의사의 양복색깔 등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매체보다 상세하게 보도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105년전 기사 최초 발견


프리프레스 외에도 싱가포르 영자신문들은 안중근의거에 관한 속보를 지속적으로 보도됐다. 저격 다음날인 10월27일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이토 저격 사실을 급전으로 전했고 11월10일엔 6면에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으며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싱가포르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만큼 세계 정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제국주의 일본의 최고위 정치인을 사살한 안중근의사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사망한 이토 백작의 저격자에 대해 11월16일 예비심문 한 결과 중죄를 범한 것으로 결론내리고 비공개 재판에 회부키로 했다는 것이다. 10월26일 이토 사살 후 3주 만의 일이다. 신문에 따르면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은 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철도·광산·산림·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에는 그동안 알려졌던 것과 일부 다른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해당 기사는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을 취재한 당시의 보도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에 보다 가까운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안중근 의사, 인장도 사용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갇힌 뤼순(旅順) 감옥에서 쓴 한자 휘호에 손바닥 '장인(掌印)'을 찍었다. 다른 인장이나 낙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장인은 안 의사의 상징으로 유명하지만, 안 의사가 실제로 도장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 의사 순국 104주기(26일)를 하루 앞두고 현대사 연구자 도진순 창원대 교수가 안 의사가 거사 직전에 쓴 도장과 그 의미를 공개했다.


안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09년 10월 24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한인 신문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주필 이강(李剛)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거사 계획을 밝히고 자신의 이름을 쓴 뒤 도장을 찍었다. 이때 찍은 도장은 둥근 형태로 세 개의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가장 안쪽 원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고, 둘째 원에는 십자가 4개를 새겼다. 바깥쪽 원에는 프랑스어로 한국을 뜻하는 'COR E'와 함께 안 의사의 성(姓)과 가톨릭 세례명(도마)을 영문으로 'AN THOMAS'라고 썼다. 도 교수는 "이 인장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이자 가톨릭 신자로서 안 의사의 정체성을 새긴 것"이라면서 "거사 당시 안 의사의 내면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안 의사는 자신의 거사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가톨릭에서는 살인을 금한 십계명의 예외 사항으로 법적인 제재 행위, 정당한 전쟁, 개인의 정당방위라는 세 경우를 든다. 안 의사는 일제의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는 대한의군(大韓義軍) 중장으로서 정당한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벌인 전투이며, 자신을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른 포로로 대우할 것을 주장했다. 도 교수는 "안 의사가 의거 후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에 성호를 그은 것은 자신의 행위가 종교적 소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확신한 것"이라면서 "이 인장은 한국의 독립과 평화의 종교인 가톨릭이 하나의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안 의사가 쓴 편지는 부치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압수됐다. 현재 편지 원본의 소장처는 알려져 있지 않고 사본만 전한다. 도장의 실물도 전하지 않는다. 안 의사는 당시 신문조서에서 "이 도장은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인데 러시아 장교에게 체포될 때 잃어버린 것 같다"고 밝혔다.


사형 직전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할빈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 주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사형직전 당부의 말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000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감이 없겠노라.”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법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안중근 의사 천주교 세례명)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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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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