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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무덤 '말(言)무덤' 이야기

 

예천 지보면 대죽리의 말무덤(言塚)을 찾아가다가 먼저 신풍마을에 들렸다. 신풍리와 대죽리 사이는 들머리 하나를 둔 가까운 거리다. 남으로 길게 흘러내린 낮은 언덕배기 밭자락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로 나누어진 것이다. 마을 앞으로 제법 넓게 펼쳐진 들녘, 낙동강이 빚어낸 비옥한 땅은 겨울의 쉼을 거두고 봄 햇살을 모으기 바쁘다. 강은 시오리 남짓 동쪽으로 흘러 내성천을 만나고 삼강을 이룬다. 1914년 그 이전만 하여도 모두 상주목 용궁현 땅, 한대마을이었던 것인데 지금은 예천군 지보면의 신풍리와 대죽리로 아주 다른 마을이 되어있다.


신풍리에 들어서면 특별한 마을의 향훈에 젖는다. 처마 끝을 마주 보고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야 여느 촌락과 다름없지만 400~500년은 족히 되었을 고목의 회나무, 그것마저도 6·25전쟁의 탄흔을 안고 있는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연둣빛 새잎을 보노라면 새삼 경이로워진다. 초록 세상에 하얀 눈송이로 덧칠을 한 듯한 눈부신 옥매화가 온통 흙 담장을 가리는가 하면 짙은 향기를 흩날리는 라일락도 마을의 그윽한 기운을 돋워준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죽호고택(竹湖古宅) 앞에 이르자 비로소 이곳이 땅과 사람이 조화롭게 사는 곳이었음을 알게 된다. 비록 낡은 기왓골이되 그 기품은 옛 그대로이리라. 사랑채인 망락당(望洛堂)에 올라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줄기를 바라본다. 주인이 마련한 다향을 음미하면서 ‘ㅁ’ 자로 구성된 정채와 사랑채를 살피다 보면 발길은 자연스럽게 정채 오른편의 고풍스러운 3칸 맞배집 건축물로 옮겨진다.
가묘라 할 수 있는 죽호사(竹湖祠) 앞에 이르자 배흘림기둥이 세월의 흔적을 오롯이 말해준다. 임란 의병으로 참여한 죽호 윤섭(1550년~1624년)이 16세기 후반에 건립하여 지금껏 그 후손이 살아온 내력을 담고 있다.


벼슬에 뜻을 거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망락당에서 독서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이웃을 계몽했던 그의 선행이 깊게 묻힌 집이다. 근대기에 들어와 어느 후손이 솜을 타다가 그만 불을 낸 까닭에 집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재건축한 상처를 안고 있지만 동행한 예천군 학예사 이재완은 도 지정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죽호 이래 이 마을은 파평윤씨의 집성촌을 이뤄 현재는 150여 호가 사는데 풍수적으로는 와우형국(蝸牛形局)의 소가 풀을 뜯어 먹고 쉬는 모습(윤철재, 죽고서원지 및 이재완(예천군 학예사)이라 하니 오죽 기름지고 평화로운 땅이겠는가.

 

죽호고택과 신풍마을의 향기를 뒤로하고 마을 앞 916번 도로를 따라 대죽마을에 이른다. 굴참나무 숲을 이룬 야트막한 뒷산에 등을 대고 90여 호가 좌우로 넓게 퍼져 사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서 남으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는 마치 하나의 커다란 키와 같은 형상이다. 마을 사람들은 삼태기 같은 형세라며 해바르고 비옥하여 살기가 좋다는 자랑에 침이 마르지만 내 보기엔 영락없는 키의 모습이다. 양쪽 팔 힘으로 아래위를 움직이면 그 바람결에 알곡과 잡것을 가려내던 키는 언제나 분잡하게 팔을 놀려 키의 목을 까딱거리게 되는데 마을 사랑이 지극한 동이장, 김씨 집과 소방관직을 마치고 귀농하여 노모와 함께 사는 효성 깊은 박씨의 집이 키의 목에 해당되는 듯하다. 그 집 언덕바지 산자락에서 마을 전경을 조망하노라면 죽호고택 망낙당에서 바라보던 그 낙동강 굽어도는 물결이 눈에 선연하게 들어온다.


마을의 왼쪽 끝단, 916번 도로와 맞닿는 지점에는 제법 널찍한 솔발언덕이 있는데 그 청솔밭은 마치 커다란 키의 힘을 받쳐 드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송곳니를 하얗게 드러내고 마구 짖을 듯이 쑥 내민 길짐승의 입주둥이처럼 보인다. 500여 년 전 어느 날 스님이 마을 앞을 지나가는데 왜 그리 마을 안이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운지 그만 가던 걸음을 멈춘다.
“에끼, 김씨! 너 말 좀 똑바로 해라, 입이 찢어졌다 해서 나오는 대로 시부랑거리면 쓰냐?” 최씨의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김서방이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까지 하면서 대꾸를 한다. “오냐 네놈은 뭐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제. 너 잘난 척하고 돌아서면 다른 사람 흉보는 그 못된 버르장머리 어디다 써 먹을래….” 서로를 헤집고 부아를 지르는 소리가 끝나지 않는다. 스님은 못들은 체하고 발길을 옮겨놓는데 이번에는 저쪽 한 켠에서 동네 젊은이들이 서로 고함을 지르고 다투며 싸움박질이다. 한참을 묵묵히 바라보던 스님은 형색이 괜찮은 듯해 보이는 집에 들어 탁발을 청하고는 한마디 말을 흘린다.


“이 동네는 말로써 패망하게 생겼어. 좌청룡은 개의 아래턱 모습이고 우백호는 위턱의 형세라 개가 마구 짖어대니 마을이 항상 시끄럽지.” 스님은 이해할 듯 말 듯한 말을 남기고 마당을 나서니 집주인 김영감이 얼른 따라나서면서 제발 동네를 구할 비방을 알려달라며 적삼을 붙든다. 그러자 스님은 말없이 그저 목탁 끝으로 마을 끝자락 왼쪽 솔밭가를 가리키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 이후 김영감은 스님의 비방법을 찾기에 몇 날 몇일을 골몰하다가 마침내 묘안을 떠올린다. 어느 날 김영감은 마을에 함께 사는 김녕 김씨, 춘천 박씨, 밀양 박씨, 김해 김씨, 진주 류씨, 경주 최씨, 인천 채씨 등 각 성씨의 대표를 자기 집으로 청하고 융숭한 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저간의 이야기와 일전 이름 모를 화상이 남기고 간 비화를 조심스럽게 전하면서 마을의 화합발전을 위한 안을 정중하게 제언한다.


그것은 스님이 준 영감에서 얻어낸 비책으로 ‘상스럽고 남을 함부로 구박하는 미움과 원망이 담긴 말’ 들을 한데 모아 지방처럼 써서 마치 신위에게 바치듯이 사발그릇에 담아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동구 밖 솔밭언저리, 짖어대는 개의 입주둥이 같은 그 언덕배기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시끄럽게 짖는 개의 송곳니를 눌러야 한다며 마을 앞 논 한가운데에 날카로운 바위 세 개를 세우고 개 앞니의 위치라고 여겨지는 마을 입구에도 바위 두 개를 심어 재갈을 채워야 하니 재갈바위를 세우자고 했다. 결국 동네사람들은 김영감이 마련한 방법에 동의하고 좋은 날을 정해 문중마다 준비한 ‘말 지방’을 사발에 담아 정성스럽게 묻는다. 일반 무덤과는 달리 흙과 돌로 수북이 쌓아올리면서 나쁜 말들은 모두 묻어버리고 반면에 덕담과 칭찬과 격려의 말만 하겠다는 서약도 함께 넣어 말 무덤을 만든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대죽마을 사람들은 말 무덤을 마치 성황당처럼 신성하게 여기면서 그것으로 하여금 저절로 말싸움도 줄어들게 되었고 그 이후 구전에 구전을 더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그 무덤은 분봉이 둥글지 않거니와 언뜻 보기에 무덤 같아 보이지도 않지만 분봉 가운데 큼직한 바윗돌이 하나 박혀 있다. 그리고 들녘 가운데의 재갈바위는 수년 전 농경지를 정리하고 마을 진입로를 내면서 파헤쳐지는데 그 중 한 개는 마을회관 앞으로 옮겨졌으나 말 무덤과 관련되는 그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말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동네 화합과 평안을 빌었다고 예천군 학예사는 전해 준다.

 
◆ 말(言)무덤은 지혜의 무덤

 
신풍과 대죽은 아랫마을과 웃마을, 혹은 왼마을과 오른마을이라 불러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만큼 하나의 자연부락이다. 부락민들은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앞들을 경작하고 낙동강 굽이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면서 풍요를 노래하는 순천백성들이다. 다만 둔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름을 달리 부르는데 다르게 불리어지는 소이가 있는 것일까. 뿌리 깊게 밴 마을의 향기가 서로 다르다. 신풍마을은 웅심 깊은 기운과 고풍스러움에 스스로 침잠해지는가 하면 대죽마을은 다잡기보다 절제를 풀고 가벼워져 나를 놓아버리게 된다. 소가 풀을 뜯고 쉬는 지세라는 신풍마을에 비하여 대죽마을은 개가 짖어대는 주등포산 형세라서 그리도 말다툼이 많았을까. 서로 이웃으로 살아온 초민들이지만 그들은 각기 다른 정신기반 위에서 그들만의 일상을 살아온 듯하다.


동성 마을인 신풍리는 혈연으로 맺어진 종적관계가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을테지만 일곱받이 여러 성씨들이 모인 대죽리는 그와 달랐을 게다. 혈연관계로 서로를 구속할 수 없는 주민들은 각기 다른 의견으로 늘상 시끄럽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대죽리는 생래적으로 논쟁을 거듭하는 삶의 문화가 축적되면서 때로 그 정도가 지나쳐 다툼으로 번져나갔으리라…. 세상살이 예나 지금이나 오죽 말이 많으랴만 말이 또한 말을 만들어 낼 것이니 그 많은 말을 경청하고 아우르는 지혜가 말보다 앞서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대죽마을의 말 무덤은 말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조금씩 참고 절제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지혜의 무덤이 아닌가 싶다. 한갖 전설이라 하여 희화적으로 인구에 올리기보다 그 옛날 초민들이 서로 의견을 모으고 미래를 도모해 나간 역동의 광장이었다는 생각에 오늘날 우리 시대의 준거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때마침 예천군에서는 말 무덤을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 인근의 죽호고택을 비롯한 죽고서원 그리고 삼강주막과 회령포를 이어 관광명소로 만들 뿐만 아니라 교육의 장으로 설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말 무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혹시 그로 하여금 또 다른 말썽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주민들도 없지 않으니 말이란 여전히 우리들에게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녔음에 조심스럽기만 하다.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대죽마을에 위치한 말(言) 무덤은 400~500년 전 사람들의 말로 인해 각 문중 간 싸움이 끊이지 않자 말을 지방형식으로 기록해 사발그릇에 담아 장사지낸 곳이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대구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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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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