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에 우연히 입구 발견 中, 기술 수준·미신 등 이유로 50년 미루다 드디어 발굴키로 ▶산소호흡기에 무균복 입고 적외선 촬영장비까지 동원, 로봇 투입하는 방안도 거론 ▶명나라 때 편찬된 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贊)에 나온 측천무후(武則天) 초상. 당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그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武則天·624~705)는 중국 내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당의 전성기를 연 유능한 인물이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을 폐위시키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나라 말기부터 그의 무덤 건릉(乾陵)에 대한 훼손과 도굴 시도가 잇따랐다. 역사 기록에 나온 것만 해도 17차례나 된다. 당나라 말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는 40만 대군을 동원해 건릉이 자리한 량산(梁山)의 절반을 파 들어 갔지만 결국 무덤 입구를 못 찾았다. 당 멸망 후 이어진 5대10국 시대 요주자사(耀州刺史) 온도(溫韜)도 10여기의 당 황릉을 파헤쳐 거부를 쌓은 뒤 수만명을 동원해 건릉 도굴에 나섰지만, 폭우와 광풍으로 중도에 포기했다. 중화민국 시절에는 군벌 쑨롄중(孫連仲)이 군사 훈련을 위장해 무덤으로 가는 길 양쪽의 3층으로 된 암석층을 폭파시키며 무덤 입구를 찾았지만 실패했다. 1960년 무덤 입구가 도로공사 발파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후에도 중국 당국은 입구 위치를 국가 기밀로 유지하면서 발굴을 미뤘다. 당시 발굴 기술 수준이 주 이유였지만, 무덤 발굴이 자칫 화(禍)를 부를 수 있다는 관념도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50년간 각종 조사를 통해 무덤 내부 구조는 거의 알려져 있다. 첨단 기기를 이용한 내부 탐측 작업이 이뤄졌다. 량산의 주봉 아래에 자리를 잡은 건릉은 남쪽 방향을 보고 있으며, 묘실 좌우 궁전에 각각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안치돼 있다. 묘실 앞뒤로 이어지는 통로 양쪽으로는 금은 제기와 서적 등 부장품이 보관된 석실이 잇달아 배치돼 있다. 현지 고고학계의 한 인사는 "당나라 시대 역사·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각종 부장품이 최소 500t 규모"라면서 "당 태종이 수집했다는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걸작 "난정서(蘭亭書)"도 부장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건릉 발굴에는 최소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시안(西安)의 진시황릉도 1990년대 초반 발굴을 시작해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원로 고고학자인 스싱방(石興邦) 산시성사회과학원 부원장은 "중국 고고학계에는 지난 수십년간 역대 황릉 발굴을 발굴해본 경험이 풍부한 수준 높은 전문가 그룹이 있다"면서 "건릉을 발굴할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