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기쁨이라고 말할 때, 살얼음 벌판에서 발구르며 홀로 외치던 이여. 시퍼런 칼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옳지 않은 것들 앞에 등돌리고 언제나 참의 편에 운명을 건 당신 어둠의 시대에 빛으로, 길 없는 시대에 큰길로, 언젠가는 하나로 설 이 나라에 큰 넋으로 왔다가는 이여 다시는 그처럼 선한 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눈물겨운 무등의 한 활개여 큰 봉우리여.” (양성우 시인 조시中) ‘시대의 의인’이자 ‘광주의 어른’인 홍남순(洪南淳) 변호사가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의 애도 속에 영면했다. 지난 10월14일 새벽 세상을 떠난 홍 변호사는 양심수 변론 등 인권활동과 민주화운동에 생애를 바친 ‘인권 변호사’로 통했다. 1912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3년 학업에 대한 열망으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4년 뒤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시립 상공학교를 졸업했다.이어 1948년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마흔의 나이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참전하기도 했다.전쟁 직후 1953년부터 10여년간 광주지방법원과 고등법원, 대전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로 활동했다. 1963년에 평생을 살아온 광주광역시 동구 궁동 자택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이후 이곳은 ‘호남민주화 운동의 산실’이자 한국현대사 민주화의 지평을 넓힌 보금자리가 됐다. 홍 변호사는 광주에서 활동하면서도 한국 민주화의 흐름에 몸을 던졌다.무엇보다 양심수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맡아 ‘법 보다는 양심’을 중시하는 법 정신을 실천했다. 특히 그는 1973년 전남대 ‘함성’지 사건, 1976년 3.1 구국선언, 1977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파면된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 필화사건, 1978년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의 교육지표사건 등 30여건의 긴급조치법 위반 사건을 맡아 ‘긴급조치 전문변호사’라는 별칭을 얻기까지 했다. 홍 변호사는 한국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사선을 넘는 투쟁을 펼쳤다.시민들과 함께 ‘죽음의 행진’에 나선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 7개월간 복역해야 했다. 이처럼 고인은 30여년 동안 민주화와 인권신장 운동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1980년대에도 신군부의 강압통치에 굴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과 5·18 명예회복에 앞장섰다.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가톨릭 인권상과 1986년 대한변호사회 인권상,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2004년에는 고인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고 양심인과 정치범사건의 변론일지를 기록한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나남출판刊)이 발간됐다. 고인의 영결식은 광주시민장으로 엄수돼 생가 앞에서 노제를 치른 뒤 국립 5·18 묘지의 5·18 영령들 곁에 묻혔다. [기자협회보]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