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군 조종사 마이클 스캇 스파이커(Speicher) 소령이 모는 FA-18 호닛 전투기가 1차 걸프전 발발 첫날인 1991년 1월 17일 밤 이라크 중서부의 사막 위에서 격추됐을 때, 스파이커의 두 아이는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미 해군이 그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발표한 2일, 아이들은 대학생 나이가 됐다. 스파이커는 전투기 추락 현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사막의 베두인족은 전투기 잔해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해 그를 묻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스파이커가 사막의 모래에 묻혀 있던 18년 동안, 스파이커의 고향 마을 친지들은 결코 그를 잊지 않았다. 고향인 플로리다 주 잭슨빌의 소방대원 사무실엔 그의 사진과 "스캇 스파이커를 석방하라"는 커다란 배너가 걸렸다. 그가 다니던 교회에선 그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기도회가 꾸준히 열렸다. 모교(母校)인 플로리다 주립대는 테니스 경기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친지들은 증거는 없었지만, 그의 생존을 믿고 무사귀환을 기다렸다. 가족들은 전사했다면 유해라도 찾아달라고 미 국방부에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 국방부는 스파이커의 지위를 애초 "전사(戰死)"에서 "실종(missing in action)", 다시 "실종/포로(missing/captured)"로 변경했다. 계급도 대령으로 진급했다. 미군 실종자 수색대는 1995년 처음으로 추락 현장을 찾았지만, 기체 잔해만 확인할 수 있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스파이커에 대한 수많은 단서가 쏟아졌다. 이 중엔 한 교도소 벽에 쓰인 MSS라는 영문 이니셜도 있었다. 미군은 이라크의 병원과 감옥·묘지 등을 뒤졌지만, 그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지난달 마침내 미군은 스파이커를 매장한 사실을 기억하는 한 이라크인의 제보로 찾아간 사막에서 스파이커의 턱뼈와 뼛조각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현장에서 발굴해낸 턱뼈는 스파이커의 치과치료 기록과 일치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의 영웅들을 집으로 데려오려는 우리의 결의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스파이커가 참전했던 1차 걸프전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시도 이날 성명을 내고 "마침내 역사는 그가 이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첫 번째 애국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기록하게 됐다"고 말했다. 빌 넬슨(Nelson) 플로리다 주 상원의원(민주)은 "이제 아이들은 아빠가 영웅이었다는 것을 알고, 생활을 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