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얼큰하게 취하셔서 막내딸 자랑하셔야죠. ------------------------------------------ 아버지! 사랑만 가득하신 아버지! 어느덧 아버지 곁을 떠난 지 25년이 흘렀네요. 아버지가 저를 낳았던 때의 나이가 되었고,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왔던 시간의 절반에 와 있기도 합니다. 신발끈을 고칠 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저도 중년이에요. 사람의 시간이 일 년 단위로 쪼개어져 있는 건 우리에게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뒤돌아 볼 때를 알려주기 위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해가 다 가는 이 시점에, 건강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아버지께 그 동안 단 한 통의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제가 말이죠. 10년 넘게 이장을 하시며 어렸을 적 동네사람들을 우리 집 마당에 가득 채우고 새마을 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시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나요. 모기 때문에 온 몸을 긁적이며 잠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연설하시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요. 마이크 없이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죠. 지난 여름에 방문했을 때 “이제는 동네에서 내가 가장 연장자여!”라고 큰 소리 치시고 “앞으로도 10년은 문제 없다”면서 소주 한 대접 들이키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론 머리 절반 이상이 희어지시고 치아는 흔들거리는데다 얼굴과 몸 곳곳에 주름져 남아 있는 세월의 흔적들 때문에 서글프기도 했답니다. |
막내딸이 위험한 곳만 골라 다닌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산등반을 하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은 바로 아버지인 걸요. 제가 히말라야의 멋진 장관을 보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시간들을 잘 견뎌내고, 소중한 인연들을 알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저 데리고 등산 한번 간 적 없는데 무슨 소리냐 물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강인한 의지와 지치지 않는 체력을 물려주신 분, 바로 아버지 아니시던가요.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숫자를 세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지만 ‘아직은 견딜 만하다’는 의지 덕분에 뒤돌아서지 않을 수 있답니다. 이것이 곧 열정이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원동력입니다. 아버지! 그리움만 가득하신 아버지! 일년에 한 두 번 뵙는 게 고작이지만 제 마음만은 늘 강렬한 태양에 그을린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군데군데 녹슨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왔냐?” 작별인사를 할 때면 눈도 안 마주치시며 “언제 올래?” 두 마디로 일관하시지만 이 안엔 들어 있는 많은 뜻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그리움이고 또 다시 헤어지는 안타까움이 아니던가요. 겉으론 무뚝뚝하시지만 사선을 넘나드는 막내딸을 걱정하고 그리워하신다고, 술 한잔 들어가시면 “딸래미 보고 싶다”는 말도 자주 하신다고 지난 번 집에 찾아갔을 때 어머니께서 전해주시더군요. 저의 목표인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후, 동네잔치를 하고 싶어요. 작은아버지, 큰오빠가 서울의 명문대에 갔을 때 마을에서 큰 잔치 했던 것처럼요. 아버지 그날 또 얼큰하게 취하셔서 동네 사람들에게 쩌렁쩌렁 딸 자랑 하셔야죠. 그날까지 열심히 논두렁 밭두렁 걸으며 건강관리 하시길 바라요. 술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드시구요. 노인정에 나가 친구 분들과도 많이 어울리세요. 아버지, 다음 생신 때 찾아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 막내딸 올림 산악인 고미영(코오롱스포츠챌린지팀)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