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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존엄사, 사회적 합의와 제도화 심포지엄

 
▶「제1발제 일반적 관점」
-‘존엄사’ 논의는 시대의 흐름이며 시대적 요구 - 최철주(前 중앙일보 논설위원실장)

▷1. 생활 속의 ‘존엄사’

우리의 일상생활은 죽음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먹고 살기에 바쁘다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습관적인 답변이며 판에 박힌 변명이다. 삶과 죽음은 너무 동떨어져 있고, 죽음은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다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만 곧 잘 잊어버린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늘 예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삶만 있고 죽음을 생각할 틈을 마련하지 못 한다.

암 등 각종 불치병 환자는 더욱 증가하고 치매 인구도 예상을 앞지를 만큼 늘어났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 사고도 줄을 잇고 뜻밖의 자연재해가 인명을 앗아가는 일이 잦다. 장수사회 그리고 웰빙 사회의 다른 한쪽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현상들이 우리들 삶의 한 부분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우리의 가족이며 엄청난 슬픔과 마음의 상처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갈등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는 사람 또한 바로 우리들의 이웃이라는 것을 뒤늦게 목격하게 된다.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던 죽음이 우리에게 덮쳐오고 가족의 문제로 비극이 확대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삶만 있고 죽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 왔던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어느 날 뒤죽박죽이 되어 정신적 황폐를 겪게 된다. 주요 지방자치단체의 문화공간에서 공공연히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교회와 사찰이 ‘죽음 준비교육’을 실시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일이다. 계절이 바뀌면 또 새로운 내용의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린다. 서울과 지방에 있는 병원이 앞을 다투어 호스피스 교육을 실시하는가 하면 자원봉사자들이 돈을 내고서라도 교육을 받겠다며 줄은 선다.

죽음은 생각하기조차 싫다는 사람들의 이중구조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가 증가하면서부터이다. 몇몇 병원들이 호스피스 병동을 만들며 ‘우리도 국민의 삶의 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한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지나쳐보지 않는 의료기관 임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이젠 내놓고 죽음의 질을 논의 해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진작 발을 들여 놓지 못한 곳이 정부이며 국회이다. 호스피스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존엄사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데 엄청난 부담을 느껴왔다. 존엄사에 관한 갖가지 오해와 낮은 사회인식이 본질을 왜곡할 수 있고 엉뚱한 괴담이 존엄사의 몸통을 흔들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짓눌려 오랫동안 몸을 사려왔다. 존엄사를 보는 사법부의 시각도 그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민들은 존엄사와 관련해 제도적으로 도움을 받기 어려운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일부 의료기관의 선의와 일부 종교단체 및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에 간신히 의지해 왔을 뿐이다. 죽음과 관련해 고통 받고 있는 환자나 그들의 가족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은 간단한 산술로 나타난다. 매년 암을 비롯해 각종 질병으로 사망한 환자는 27만명(교통사고와 자살에 의한 사망자 2만여 명 포함). 해마다 새로 발생하는 암 환자는 12만여 명. 이미 암 투병중인 환자를 모두 합쳐 36만여 명이 암의 공포에 떨고 있다. 통계에 나타나지 않은 식물인간도 우리 곁에 있다.

이 밖에 치매 환자는 42만여 명이나 된다. 이들 환자와 가족들을 모두 합치면 해마다 500~600만 명이 죽음을 겪거나 땀과 눈물로 그 고통을 같이 체험하고 있다. 전 인구의 5분의 1 정도이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 중풍환자 60여만 명을 감안하면 우리들의 일상은 죽음이라는 불편한 진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죽음을 내놓고 논의해서는 아니 되는가-를 묻고 싶다.

▷2. 존엄사 제도화의 ‘시기 상조론’에 대한 비판
-당신은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환자들에게 진지하게 다가선 적이 있는가.
-그들에게 남아있는 삶이 무엇이며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슴 밑바닥에서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거기서 눈물 한 방울 흘려 본 적이 있는가.

그런 다음에도 당신이 자신있게 ‘존엄사 제도 도입은 아직도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변할 준비를 해야한다. “말기환자인 당신의 수명은 대략 1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수술을 받겠는가. 항암제 투여에 따른 고통도 이겨낼 수 있겠는가.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인생을 그렇게 끝 맺음 해도 좋은가”

아시아에서 맨 먼저 호스피스 치료를 시작한 한국이 그로부터 반세기가 다 흘러가도록 이를 제도화 하지 못하고 아직도 존엄사 논의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래 지속 되어온 ‘시기 상조론’에는 진지한 태도가 결여돼 있다. 그 같은 주장은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 환자의 인권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주장은 오히려 환자의 인권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죽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의 인권이 지나치게 포장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적어도 죽음의 질을 보장해주는 인권을 우리는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치료를 받으며 마지막 몇 달, 혹은 며칠을 보내는 말기환자들은 그들의 삶과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 모습을 통해 가족에게 좋은 삶을 가르친다. 존엄사 제도 도입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자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삶의 질도 보아야 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건강한 사람들도 죽음의 질을 존중할 줄 알면 그들의 삶의 질이 더 높아진다. 선진국들이 초등학교 시절 부터 죽음 교육을 실시하는 이유는 국민들의 보람 있는 삶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스스럼없이 존엄사를 선택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3. 다시 시험대에 오른 ‘존엄사 논의’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지 벌써 12년이나 흘렀다. 이미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제는 4만 달러 시대의 비젼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6년 전부터 웰빙 시대를 구가하면서 삶의 질을 찾기 시작한 우리들은 지금까지 전혀 겪어보지 못한 장수사회의 길목에서도 암 등 불치병의 공포를 피해 다녔다. ‘삶의 질’틀 안에 "죽음의 질’이 있다는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해 왔다.

그같이 질주하는 습관은 고속 성장 시대를 지나 중속 성장 또는 저속 성장 시대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정부가 죽음의 논의에 물꼬를 트지 못했고, 정치가 이를 눈감았으며 언론이 이를 바로보지 못했다. 존엄사 논의가 흘러나올 기회는 계속 억제 되었다. 이 같이 ‘주의 태만 기간’이 오랜 나라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나라치곤 한국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에선 존엄사 논의가 수면 위에 떠오를 때 마다 이를 망치로 내려치는 ‘두더지 잡기 게임’이 벌어졌다. 가장 신사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했다.

2001년에 이어 2002년에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의료지침’은 두더지 잡기의 희생이 되었다. 이를 발표했던 대한 의학회가 백기를 들고 사라진 것이다. 의사들에게 돌파매질이 시작되었다. 정상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때의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정부가 이런 논의에서 계속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것은 2002년의 돌팔매질 추억을 떨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국회가 존엄사 논의에 과감히 나선 것은 ‘죽음의 질’ 문제가 의외로 심각하다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은 30여 년 전인 1970년대 중반에 캘리포니아 주가 자연사법(natural death act)을 만들었다. 당시 자연사법은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존엄사 또는 품위있는 죽음과 다를 바 없다. 말기환자에게 과잉진료를 중단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다. 초기의 논쟁에 기름을 부었던 ‘안락사’라는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주에 이어 다른 주들도 연달아 자연사법을 만들었다. 미 국민의 소득이 증가하고 생활 패턴에 변화가 생긴 시점이다. 의학의 발달과 함께 수명이 늘어나고 국민의식도 달라졌다.

삶의 질이 높아진 것처럼 죽음의 질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1989년에 제정된 미국의 ‘표준 말기환자 권리법’ 제2조는 ‘생명유지 치료에 관한 선언서’를 만들었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연장시키는 조치를 보류 또는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자연사법을 제정한 이후에 안락사협회의 이름을 존엄사협회로 바꾸었다. 안락사에 대한 예민한 반응 때문이었다. ‘안락사’가 사회적 차별이나 강자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판단에서였다.

세계의사회가 스페인 리스본에서 존엄사를 지지하는 선언서를 채택한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일본은 세계 제일의 장수국가이다. 불치병 환자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이제는 존엄사를 생각할 때라는 운동이 벌어졌다. 민간단체와 함께 정치권이 동시에 손을 들고 일어났다. 2005년 6월에는 일본 전국에서 존엄사 제도 도입을 지지하는 14만 명이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90여 명의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존엄사 법제화를 생각하는 의원연맹’을 중심으로 입법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7년의 일이다. 존엄사에 대한 언론의 편견도 없어졌다.

일본은 미국과 시간차를 두고 안락사 및 존엄사 논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90년대로 넘어가면서 존엄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삶의 질을 추구하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 안락사 또는 소극적 안락사로 여겼던 죽음이 존엄사 또는 자연사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종교 문화적 배경과 인권사상의 뿌리가 달랐으나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은 같았으며 그것이 죽음의 질로 까지 넓혀졌다.

일본의 민간 조직인 존엄사협회의 회원 12만1천여 명은 자신이 말기환자가 되었을 때 존엄사를 요구하는 생전 유언(living will)남기기 운동을 벌여왔다. 전국의 병원들은 이들의 생전 유언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다. 행정부나 사법부도 이같은 시대상황을 정책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작년에 말기의료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공표한 것은 사안의 시급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 2005년 10월 연방대법원 건물 앞에서 안락사 허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미국 국민들. 안락사는 어느 사회에서나 찬반이 엇갈리는 민감한 이슈다.
▷4. 존엄사 논의의 회색지대
어느 정책이나 제도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우려되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확실하게 재단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회색지대에서 논의되는 다소 애매한 사항들은 제도나 정책을 실시하는 취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보완하거나 해결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존엄사를 ‘소극적 안락사 인정’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더러 발생한다. ‘안락사’ 개념을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과거의 나쁜 사례에서 오는 선입관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서 목격되는 일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은 의료현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허상을 가지고 있다.

-환자를 실은 구급차가 응급실에 도착하면 병원 의사들이 뛰쳐나온다?
-대개의 말기 환자들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든 의사들은 의과대학 시절 인간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교육 받았다?
-모든 의사들은 환자의 통증을 잘 이해한다?

정답은 의외로 ‘사실이 아니다’이다.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지녀왔던 믿음이 허물어지거나 또는 색다른 오해가 더욱 쌓이기도 한다. 존엄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말기환자의 자연사로 이해되는 존엄사에 대해 ‘더 적극적인 치료를 했다면 생존기간이 연장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소극적 안락사로 몰고 가는 일부의 견해가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존엄사 제도가 강자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라든가 또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문제를 발생 시킨다는 주장이 꼬리를 이었으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그라졌다.

1997년 보라매 병원 사건 이후 의사들은 방어 진료에 매달려 왔다. 전혀 회복하기 어려운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며 이에 ‘생명존중 행위’ 라는 미명을 붙여도 되느냐는 불만이 의료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로 인해 병원의 과잉진료를 부추기는 현상도 나타났다. 사법부는 아직까지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올해 7월 서울서부지방법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행위 중지 등 가처분에서 이를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생명의 단축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치료중단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인정 여부에 대하여 사회적 합의 또는 승인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일본학술회의는 지난 2월 말기환자 치료에 관한 새로운 보고서를 채택했다. 생전 유언(리빙 윌)을 통해 환자가 의사를 확실히 밝힌 경우 병원 측이 이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만약에 전후가 분명치 않을 경우에는 가족에 의한 환자의 의사 추정(意思 推定)을 새롭게 인정했다. 환자 본인이 미처 생전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평소의 생각과 행동이 존엄사를 요구했다는 여러 가지 정황을 가족이 병원 측에 전달한다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치료 중단에 대한 선택’에 대해서 한국은 일본처럼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넘어야 할 큰 장벽이다. 누구나 선의를 갖고 접근하지 않으면 이같은 어려움을 이겨내기 어렵다. 선의가 집결 하지 않으면 악의가 이를 축출한다. 엉뚱한 괴담으로 죽음의 질을 추구하는 일이 중단 될지도 모른다. 존엄사 논의의 회색지대에 잠복해 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의료비용을 줄이기 위해 존엄사 제도를 도입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비난이다. 공공연하게 이 논의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존엄사 제도 도입 문제는 참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갈 수 있다.

자칫 개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된다. 말기환자에 대한 호스피스 치료는 환자 자신이나 국가의 의료 부담을 줄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들의 경우 이에 대한 비판은 초기에 잠들었다.

말기 환자 자신이나 그 가족들이 차마 꺼내지 못하는 걱정거리가 있다. 환자가 무의미한 치료 중단을 선택할 경우 의료진이 진즉부터 성의 있는 치료를 포기할 우려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존엄사 제도 하에서 의료진들의 책무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말기 환자에 대한 모든 진료가 가족에게 투명하게 공개될 뿐 아니라 병원 내의 의료윤리위원회가 진료행위의 성실성 여부를 감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효도 이데올로기의 갈등
효(孝)에 대한 우리들의 관습이나 사상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효(孝)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장묘문화에서 나타났다. 매장 보다는 화장을 선택하는 가족이 엄청 늘어난 것이다. 9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과 관련해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말기 환자의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효가 심각한 마찰을 일으킨다. 환자 자신이 아니라 가족들이 느끼는 갈등이다. 이는 우리가 오랜 동안 받들어왔던 순수한 효도문화의 변화 또는 변질의 다른 한 측면이다. 그것은 가족의 대외적인 체면에 직결되어 있고 가족 구성원 사이의 입장과 영향력에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부모나 아내, 남편 또는 자식들이 호스피스 치료를 받도록 하고 편안한 모습의 존엄사를 선택하도록 도왔다 하더라도 사후에 뒷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할 것이라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죄인이 될지 모른다는 자책감이 앞서기도 한다. 우선은 말기 환자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차라리 모든 기계적 치료를 받도록 서두르는 것이 최선이며, 그렇게 ‘효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남아있는 우리의 심적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마음 속 깊이 감출 수밖에 없는 고뇌 덩어리이다. 이처럼 호스피스 치료는 환자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가족에겐 뜨거운 감자로 남는다. 우리가 냉정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효도 이데올로기에 빠진 나머지 떠나는 자의 격렬한 고통을 지나쳐 보는 것은 아닌가.

▷6.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언어는 힘을 갖는다. 우리가 좋은 말을 듣거나 좋은 말을 쓰면 마음도 가벼워진다. 언어의 여운은 항상 길게 남는다. 좋은 언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기 시작하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언어로 복권하기 힘들어진다. ‘존엄사’라는 언어가 등장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다. 그 이전에는 ‘존엄사’가 국어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안락사’만이 사전에 등재 됐었다. ‘안락사’나 ‘존엄사’라는 2개의 단어는 일본에서 먼저 번역되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빌린 것이다. 2개의 단어에 대한 두 나라 국민의 감정과 느낌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존엄사’를 수용하는 무게가 달라진 것은 사회적 발전 속도나 국민의식 수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모티브로 한 두 나라의 문화 예술 작품에서도 언뜻 비교 될 수 있다.

일본은 이미 민간 조직이 주도하는 리빙 윌(생전유언) 제도가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일본 정부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작년에 공표했다.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여러 계층의 전문가들이 노력한 결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존엄사’가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온 ‘안락사’와 대립적인 개념으로 사용 되기고 하고 때로는 혼합 사용되기도 하면서 많은 혼란을 겪었다. 나치 독일이 사회적 약자를 학살한 수단으로서의 ‘안락사’ 등 여러 가지 잔상(殘像)이 나쁜 선입관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효(孝)의 이데올로기와 마찰을 일으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최근 10여 년 동안에 몇 개의 사회적 금기를 무너뜨렸다. 첫 번째는 성(性)에 대한 금기이다. 아우성(아름다운 우리들의 성을 위하여)이라는 이름의 캠페인이 성에 대한 우리들의 무지와 부끄러움을 깨우쳐주었다. 두 번째는 장묘문화 개선에 대한 캠페인이다. 우리의 조상 또는 우리 가족의 시신을 화장하자는 운동이었다. 시신을 태우는 화장은 유교사회에서 깨뜨리기 어려운 금기 사항이다. 이 두 개의 금기사항이 허물어지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금기 사항에 부딪혔다. 말기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를 서로 논의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논쟁하면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시대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 선진국들은 10년 전 또는 20~30년 전에 그 일을 겪었으며 갈등의 장벽을 넘어섰다. 우리나라도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조성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관련법이 제정 또는 개정되기 이전이라도 정부가 호스피스 완화의료 제도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존엄사에 대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안이 검토되어야 할 시점이다.

▶[출처] 존엄사, 사회적 합의와 제도화 심포지엄 (한국죽음준비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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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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