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병합 이전에 이미 한반도와 만주지역 고고학 발굴조사를 주도한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7-1935)는 1911년 10월에 평양 일대 고구려 고분발굴조사 일환으로 평안남도 강동군 마산면(馬山面)에 있던 대형 고분을 조사했다. 현지에서 한왕묘(漢王墓), 혹은 황제묘라 하기도 하고, 한평동 고분이라고 일컫던 이 고분은 현재 북한에서는 김형직이 만든 경신중학교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경신리 1호"라고 부른다. 세키노가 이 고분을 발굴 대상으로 점찍은 까닭은 강동읍에서 서남쪽으로 1.56㎞ 가량 떨어진 대동강 변에 위치하는 이 무덤이 강동 일대에서는 봉분 규모가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애초 이 한왕묘는 1909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소속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굴착조사를 시도했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 실패했던 곳이다. |
그는 1911년 10월5일 현지 관헌의 도움 아래 발굴 첫 삽을 떴으며 이후 보름난인 18일 매장 주체부인 현실(玄室)을 확인했다. 이 한왕묘 조사 성과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Ⅱ"에 도면과 도판 몇 장이 수록된 것이 전부다. 비단 이 무덤 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본인들이 조사한 고구려 유적 발굴성과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 조사 자료 상당수가 일본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조사를 주도한 세키노가 남긴 자료라든가 유물은 그의 모교이면서 교수로 재직한 도쿄대학에 원고 뭉치 형태로 남아있다. 도쿄대 고고학연구실 유학 시절에 이미 세키노 자료에 주목하고 그 정리작업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정인성(鄭仁盛) 교수가 마침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기획한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5개년 프로젝트라는 힘을 빌려 100년 전 일본인들의 조사성과를 보고서 형태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
이렇게 해서 그 프로젝트 첫번째 성과물로 "일제 강점기 고구려 유적조사 재검토와 관동지역 소재 고구려 유물"을 정리한 첫 보고서가 최근 제출됐다. 일본측 조사 파트너로는 도쿄대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 한국조선문화연구전공 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 조교수가 참여했다. 그 결과 한왕묘 뿐만 아니라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에 조사한 평양 사동 고분을 비롯해 간성리 고분군, 강서삼묘, 매산리 고분군, 화상리 고분군, 용강총, 쌍영총 고분 등의 고구려 유적 조사 성과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복원됐다. 정 교수는 "식민지시대 고고학 조사 특징 중 하나가 일본이 낙랑 유적에 열성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시대는 물론이고 일제 패망 이후에도 낙랑 유적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 성과가 속속 공개됐다"면서 "하지만 이에 비해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현재 소재 파악이 가능한 관련 기록들은 모두 모아 재정리하는 한편, 일본 각 기관에 소장된 관련 유물 또한 정밀 재촬영을 했다. 세키노가 발굴현장에서 쓴 소위 야장(野帳)이라는 필기 노트 또한 긴요하게 활용됐다. |
세키노 야장에 의하면 고분 조사에 돌입한지 5일만인 10월10일, 수직으로 파내려가던 봉토가 붕괴하면서 작업 중인 조선인 인부 1명이 매몰되고 2명은 허리까지 묻히고 말았다. 그러자 인부들은 고분은 파면 천벌을 받는다고 작업을 거부하고는 모두 현장을 철수해 버린 것이다. 이에 세키노는 겨우 평양으로 돌아가 조선인 인부 10여 명을 데리고 다시 현장에 도착한 다음에야 작업을 재개해 18일 현실로 들어가고 그 다음날 아침 평양으로 복귀했다. 나아가 조선고적도보 등지에서 발굴현장에 등장하는 조선인 조사인부는 거의 예외 없이 흰 복장에 흰 두건을 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이번 조사과정에서 인부를 구별하기 위한 별도 복장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연합뉴스]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