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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죽은 사람의 도시’(Cities of the Dead), 네크로폴리스

 
- <묘지의 무덤들. 집과 같이 생겼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는 거대한 무덤 구역이 시내 한 복판에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죽은 사람의 도시"(Cities of the Dead)라고 불리는 무덤 구역은 12세기 건축물 ‘살라딘 성’의 남북으로 수 킬로미터에 걸쳐 있다. 무덤 구역은 카이로 시내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로지르는 간선도로 ‘샤리아 살라흐 살림’을 따라 차를 타고 가면 보인다.

카이로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은 낡은 이슬람식 석조 건물들이 가득한 지역을 차창 밖으로 보고, 이 지역이 둘러볼 가치가 있는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눈 앞에 우뚝 서있는 ‘살라딘 성’에 시선을 뺐기기 쉽다. "죽은 사람의 도시"는 아랍어로는 ‘아라파’(표기는 Al-Qarafa,발음과는 다르다), 영어로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고 한다. 이 지역에는 중세 이집트의 술탄과 그의 아미르들(귀족), 그리고 그의 가족 무덤 수 천 개가 있는 이집트 역사와 문화의 보물 창고다.

‘죽은 사람의 도시’에는 ‘망자(亡者)’뿐만 아니라, 산 사람도 다수 살고 있다. 빈민들이 무덤 집에서 살고 있다. 그 수가 500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집트인은 무덤을 한국과 다르게 묘역에 천정이 있는 집을 만들기 때문에, 산 사람도 그 안에 들어가 살 수 있다. 없는 사람들도 지붕은 아니더라도, 묘역에 최소한 담을 두르고 출입문을 만든다. 얼핏 멀리서 건물을 보거나, 이집트 장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무덤을 일반 주택으로 착각할 수 있다. 외부인이 볼 때 산 사람이 무덤 구역에서 산다는 건 매우 이상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외국 특파원들이 무덤 구역에서 사는 이집트 사람들의 생활을 취재해서 보도하는 걸 본 적도 있다.

 
- <무덤 동네에 사는 사람들. 차가운 현실과는 달리 이들의 밝은 표정이 인상적이다>
14세기에 카이로를 방문한 외국인은 사람들이 무덤 구역에 무덤 관리인으로, 혹은 단순히 주민으로 살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Islamic Monuments in Cairo’의 저자). 14세기에만 카이로 인구가 50만이었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땅이 부족하다 보니 도시 바로 옆에 자리잡은 무덤 구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해석이다. 오늘날 이집트인들이 ‘무덤 구역’에 사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닌 셈이다.

‘죽은 사람의 도시’는 크게 ‘북쪽 무덤 구역’과 ‘남쪽 무덤 구역’으로 나눠진다. 사람에 따라서는 ‘북쪽 구역’ ‘남쪽 구역’ ‘밥 알 나스르(Bab al-Nasr) 구역’ ‘밥 알 와지르(Bab al-Wazir) 구역, ‘위인들의 무덤(Cemetery of the Great’ 등 5 구역으로 나누기도 한다. ‘북쪽 구역’에는 맘룩 술탄 시대(1250-1517년) 술탄들의 무덤이 유명하며, ‘남쪽 구역’에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헤디브 조(朝)’의 왕실 무덤이 볼만하다. ‘밥 알 나스르’ 지역은 나무로 만든 비석과 무덤집이 눈에 띠며, 사회학을 개척한 튀니지 출신 이븐 할둔(1332-1406년)이 묻혀있다.

1. 북쪽 무덤 구역: ‘북쪽 무덤 구역’은 살라딘 성에서 북동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뻗어있다. ‘남쪽 무덤 구역’보다는 조금 크기가 적다. 원래는 이어져 있었는데, 6차선 도로 ‘살라흐 살림 도로’가 나면서 나눠졌다.

주로 15세기에 개발됐고, 맘룩 술탄 시대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 이 구역에서 세 개의 무덤 사원 건물군이 유명하다. 콰이트배이(Qaytbay, 재위 기간 1468~1496년), 알 아쉬라프 바르스배이(al-Ashraf Barsbay, 재위 기간 1422~1438년), 파락 이븐 바르쿡(Farag ibn Barquq, 재위기간 1400~1411년) 등 맘룩 술탄 세 명이 건물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흔히 ‘부르기 맘룩 술탄’(Burgi Mamluk Sultan)이라고 불리는 맘룩 시대 후반기(1382-1557년) 통치자 그룹 출신이다. 지중해 권과 인도양 권의 중계 무역으로 국부를 쌓았던 맘룩 술탄은 건축을 좋아했다. 살라딘 성내의 칼라운(Qala’un) 모스크, 살라딘 성 북동쪽의 술탄 핫산 모스크도 그 시대 건축물이다.

 
- <바르스배이 무덤사원 내부 모습>
북쪽 무덤 구역의 3대 건물중 백미는 콰이트배이 술탄의 무덤 건물군이다. 이집트 화폐 1파운드 지폐의 뒷면에 등장할 정도이며, 맘룩 왕조 시대 하반기 건축의 보석이라고 불린다.

무덤 사원 군은 1474년 완성된 건물은 영묘(靈墓)와, 영묘 오른쪽의 마드라사 겸 모스크로 구성되어 있다. ‘카이로의 이슬람 건축’ 저자에 따르면 영묘 내부는 “카이로에서 가장 인상적인 현실(玄室,무덤 방)중 하나”다. 필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모스크 내부에 들어가 내부 장식을 보고 있을 때 벽에 뚫린 창으로 햇볕이 안으로 비치는데, 내부에 먼지가 얼마나 많은지 숨을 쉬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내부를 제대로 둘러볼 수 없었다.

영묘의 돔 장식은 별 장식과 꽃 모양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미나렛 역시 맘룩 시대 건축으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다. 맘룩 시대 미나렛은 3층으로 되어있고, 조각이 매우 화려하다. 미나렛 겉면에는 “죽음, 당신이 피하려 하지만, 당신을 잡는다” “죽음은 아버지도 아들도 피해 가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영묘의 주인 콰이트배이는 맘룩 왕조 시대의 45번째 통치자로 재위 기간은 1468~1496년이다. 그의 임기 후반인 1492년은 콜롬부스가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해이고, 한반도에서는 조선의 9대 왕인 성종 치세였다. 콰이트배이는 50디나르에 이집트에 팔려온 노예였다. 백인 노예들을 군인으로 키웠던 당시 터키와 중동의 인재 양성 방식의 혜택을 본 경우로, ‘맘룩’이라고 불렸던 노예 군인 생활 끝에 나이 54세 권력을 잡아 28년간 이집트를 호령했다. 그는 지도자로 당시 중근동에 떠오르는 세력인 오스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유럽 특히 이탈리와 중계 무역으로 국부를 불리는데 힘썼다.

 
- <바르쿡 무덤사원>
콰이트배이는 건축왕으로 명성이 높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시리아, 팔레스타인, 메카에 있는 85개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보수했다. 그의 제후들에게도 건축을 장려, 카이로에만 그의 시대 건물 유적이 17개나 된다. 그의 시대 건물은 디테일이 매우 장식적이고, 섬세하다.

이 건물을 알 아즈하르 모스크 앞에서 가려면 택시 운전사에게 ‘샤리아 살라흐 살림(살라흐 살림 도로라는 뜻), 아라파(영어로 표기는 al-Qarafa라고 하나, 발음은 아라파라고 함)’이라고 말하면 된다. 알 아즈하르 모스크 바로 앞에서 택시를 타야 방향이 맞다. 건너편의 알 후세이니 모스크쪽에서 타면 안된다. 택시가 동쪽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면 샤리아 살라흐 살림 도로 밑으로 내려갔다가, 바로 ‘알 콰라파’로 접어든다. 그곳에서 콰이트배이를 찾으면 된다. 혹은 알 아즈하르에서 10여분 동쪽으로 걸어가도 된다.

콰이트배이 무덤사원군을 보고,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골목길을 올라가면 바르스배이 무덤사원군과, 파락 이븐 바르쿡의 무덤 사원군이 나온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연대기 별 순서대로 서있으니, 거꾸로 걸어 올라가면 건축 양식의 시대별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다. 바르스배이 무덤 사원군은 상당히 크게 자리잡고 있는데, 모스크와 돔 아래 자리잡은 영묘만 남아있다.
 
- <남부 무덤 구역의 한 장면. 산자와 죽은 자의 공간 구분이 없다>
모스크에 들어가니 60대인 건물 관리인이 형광등을 켜 어두운 실내를 밝혀주고, 설교단(‘민바르’) 옆에 새겨진 상아 장식을 보여줬다. 콰이트배이 무덤 사원 건물과 같이 창문의 모자이크 장식이 매우 아름다웠다. 바르르배이 무덤 사원군에서 100미터쯤 올라가면 파락 이븐 바르쿡 무덤 사원이 나온다. 이 무덤 사원은 상당히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었다. 3층의 미나렛 중 맨 아랫층은 사각형이고, 위쪽은 원형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길에 접한 쪽에서 보았을 때 건물의 오른쪽이자, 입구가 있는 쪽에선 ‘사빌-쿠땁’ 건물 양식을 볼 수 있었다. ‘사빌-쿠땁’은 1층에는 식수 대(사빌), 2층에는 코란을 공부하는 공간(쿠땁)이 있는 건물구조로, 중세 이집트에 매우 흔한 건축 설계 방식이다. 이 무덤 사원은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사원 앞에 있는 노변 카페에 앉아있던 관리인이 건물에 들어가려는 나를 제지했다.

2. 남쪽 무덤 지역: 살라딘 성의 서쪽에서, 남쪽의 주거지역 마아디에 까지 길게 뻗어있다. 이곳에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왕실 무덤이 있다.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재위 1805~1848년)는 맘룩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근대 이집트를 연 인물이다. 본인은 살라딘 성 내 무함마드 알리 사원에 묻혀 있다. 남쪽 무덤 지역에는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 무덤도 있다.

 
-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왕실 무덤 건물>
무함마드 알리 가문의 무덤은 ‘호쉬 알-바샤’(Hosh al-Basha)라고 불린다. 알 이맘 알 샤피이 거리에 있다. 1854년에 건설된 이 곳의 입장료는 15파운드. 정문에 들어서면 안뜰이 나오고, 뜰 가운데로 난 회랑을 따라 무덤 건물로 들어서게 되어 있다. 건물은 6개의 돔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무덤 장식은 그리 호화스럽지 않았고, 왕들이 하나의 천정 아래 하나의 큰 공간에 같이 묻혀 있는 점이 이방인의 눈에는 특이했다.

내가 찾았을 때는 서양 관광객들이 마침 6,7명 돌아보고 있었다. 무덤 관리인이 카메라를 보고 사진 촬영하려면 20파운드를 내라고 요구해서 ‘어디에 그런게 쓰여있느냐’고 반문했더니 그는 머쓱해하며 겸연쩍어했다. 물정모르는 관광객인줄 알고 돈을 뜯어내려다 뒤통수를 맞았던 것이다.

‘호쉬 알-바샤’에는 무함마드 알리의 부인들과, 그의 후손들이 묻혀 있다. 무함마드 알리의 두 아들로 이집트의 강역을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로 일시적으로 넓힌 투순 파샤(Tusun Pasha)와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 수에즈 운하를 완공시킨 이스마일(Ismail, 재위 1863~1879년)이 묻혀 있다. 압델 나세르의 1952년 군사 쿠데타로 퇴위한 뒤 스위스에 망명했던 마지막 왕 파룩도 죽어서는 고국 땅에 잠들어 있었다.

 
- <루콰이야 무덤과, 그 오른쪽의 무함마드 알 가아파리 무덤>
투순 파샤와 이스마일의 무덤이 입구 쪽에서 가까우며, 이브라힘 파샤의 무덤이 가장 장식적이었다. 한 가이드는 이브라힘 파샤의 묘비 장식은 페르샤의 장인이 했는데, 그는 작업을 마친 뒤 또다시 같은 작품을 남기지 않겠다는 뜻에서 손을 잘랐다고 말했다.

남쪽 무덤 구역의 또다른 볼거리로는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제4대 칼리프)의 딸 무덤이다. 사이이다 루콰이야(Sayyda Ruqayya)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남편 알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아니고, 알리의 다른 부인 소생이다. 루콰이야는 아라비아에서 이집트로 건너 왔고, 카이로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적은 명성만큼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남쪽 무덤의 북쪽 지역인 ‘미단 사이이이다 나피사’(Midan Sayyida Nafisa) 인근에 있는 루콰이야 무덤은 건물은 너무 허름했다. 미단은 아랍어로 ‘광장’이다. 무덤 내부의 메카를 향해 난 벽면 장식인 미흐랍이 아름답다고 이슬람 건축 안내 책자에 나와있으나, 신발 끈을 풀고 무덤 건물 내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덤 오른쪽 옆에는 시아파 6대 이맘인 자아파르 앗 사딕(Ja"far as-Sadiq, 혹은 가아파르 알 사덱 Ga"far Al- Sadeq이라고도 표기)의 아들 무함마드 알 가아파리(Muhammad al-Ga’fari.824년 사망)의 무덤이 있다.

‘미단 사이이이다 나피사’에 있는 사이이이다 나피사 사원 뒤쪽에는 압바스 칼리프(Abbasiad Caliphs)들의 영묘가 있다(영묘는 크기도 작고, 볼품없다. 1242년 지어졌으며, 안에는 8개의 묘비와 17개의 무덤이 들어있다). 압바스 칼리프는 바그다드에 있던 칼리프들이 1368년 몽골의 침략으로 무력화된뒤 당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 의해 4년 뒤 이집트로 온 허수아비 칼리프들이다. 이들은 오스만 조가 이집트를 정복, 자신들이 칼리프 자리를 가져갈 때까지 이집트에서 명목적으로 대를 이었다. (최준석 기자, 조선닷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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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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