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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지병목)이 국립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에 마련된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 작은 전시회가 3월1일부터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전시회에서는 고종의 승하에서 국장, 영면까지의 과정 동안 당시 고종 황제 국장 때 촬영한 사진과 의궤 등에 남겨진 기록, 고종이 잠들어 있는 홍릉의 사진 등 총 15건의 유물이 소개됐다.. ‘고종의 승하’, ‘고종의 국장’, ‘고종의 영면’ 등 총 3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는데 고종 황제의 승하 당시 제작된 어보(御寶)와 옥책(玉冊) 등으로 당시 왕실 의례의 면모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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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시회와 함께 21일 오후 2시 고종황제 국장 전시와 연계한 특별 학술강연회가 '고종 국장과 1919년 사회'라는 주제로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개최됐다.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학술강연회 '고종국장과 1919년의 사회' 란 주제로 열린 강연회의 제1강연에서는 이욱 선임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고종황제의 국장 과정을 분석해 대한제국 황실 의례가 국권피탈 이후 어떻게 변형됐는지 소개했다, 흥미있는 것은 고종황제의 국장은 조선총독부 '야마가타 이사부로' 정무총감이 '장의괘장'을 맡았고 그 밑에서 재관장을 맡은 '이토 히로구니'는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養子) 였다는 사실이다.
강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1시간 동안 차분히 진행된 강연회에서 이욱 선인연구원은 100년 전 당시의 국장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소개한 후 고종 국장의 특징을 4가지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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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장례식은 일본 국장식에 조선의 옛 관습을 더하는 형식으로 거행되었다. 여기서 국장식은 일본식을 의미하였다. 당시 일본의 황실 및 황족의 국장은 불교식에서 벗어나 신도식(神道式)으로 새로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장의괘 주관으로 거행되었던 고종국장의 중요 의식은 국장봉고의(國葬奉告儀), 사뢰의(賜뢰儀), 매장 前 영구 앞에서 거행하는 제의(祭儀), 영거 발인의(發引儀), 장장제의(葬場祭儀), 매장후 임시건물에서 거행하는 제의(祭儀), 매장후 묘소(墓所)에서 거행하는 제의(祭儀) 등 7가지였다.
조선시대의 국장과 비교할때 다른 점은 다음 네가지이다.
첫째, 고종의 지위변동에 따른 사제(賜祭)형식이다. 고종이나 그의 지위를 승계한 상주(喪主)는 주권을 가진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은 국왕의 승하에 따른 애통과 왕권의 계승까지를 포괄하지 못하였다. 반면 일본 천황이 그 죽음을 애도하여 내려주는 제사형식이 국장의 주요부분을 차지하였다.
둘째, 공식적 일본식 장례와 비공식적인 조선식 장례의 이원화이다. 위 7가지 의식은 철저하게 일본식으로 진행되었다. 지데(紙垂, 四手), 사카키(神樹) 등과 같이 일본 장례식에 보이는 의물(儀物, 용품)이 등장하였으며
신도(神度)복장을 한 제관(祭官)이 의식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망자를 위한 음식도 달랐다. 전통적 의장은 대여(大輿)와 그주변을 둘러싼 삽선, 그리고 상복(喪服) 등이 전부였다. 음악의 사용 역시 조선의 상례에서 볼 수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조선의 상례와 비교할 때 혼백(魂帛)의 부재를 지적할 수 있다. 망자를 나타내는 표상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이전의 일본 국장과 고종의 것을 비교하면 묘소의 의미가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묘제를 조선식으로 거행함으로써 국장의 의식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전통과 근대의 관점에서 볼때 고종국장의 중심 의식인 장장제의(葬場祭儀)는 근대적 의식의 한 형태로 볼수 있다. 훈련원터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근대식 장례식을 일본식으로개조한 것이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발인행렬에서 책보(冊寶)대신 훈장(勳章)이 등장한 것이나 장례식장에서 철도 레일로 대여를 옮기는것 역시 근대적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들을 통해 조선식은 구관습적인 것인 반면 일본식은 근대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졌다.
넷째,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은 발인행렬에 여사군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발인 행령의 의장과 기물, 그리고 그 절차는 구례(舊例)이지만 결국 이를 메고 들고가는 사람들의 역사였다.
대한문에서 홍릉까지 이어진 발인의 시공간은 식민지 10년의 시간속에서 망각되었던 조선의 문화를 다시 접하고 되살리는 현장이었다. 흥인문에서 홍릉까지 행렬은 전통의 양식을 따랐다. 그리고 홍릉의 제도는 황제의 모습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권력이 없는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황제였다. 조선시대의 예(禮)가 권력과 사회의 반영이고 표상이었다면 이제 예는 전통의 회상으로 존재하였다. 비극이고 슬픔이다. 그러나 패망한 나라의 군주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그 슬픔에 공감하며 정치적 독립과 역사와 정서의 독립을 바라던 국민들이 태극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윤소영 연구원의 제2강연 '고종의 서거와 3.1운동'에서는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 고종의 죽음으로 커져 간 고종 독살설과 3.1운동의 관계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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