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노인의 삶, 中高生들이 자서전 만들다

  • 등록 2015.01.28 16: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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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스펙위해 지원했지만 그분들 이야기 들을수록 우리가 빚지고 있다는 생각"


서울 노원구의 12평 임대아파트에 혼자 사는 양모(87) 할머니는 호적상으로는 일흔둘이다. 아들 귀한 집에서 구박 받으며 자라 열다섯 살에야 호적에 올랐다고 한다. 어머니가 정해준 남자에게 시집가 천덕꾸러기로 살았지만 갓난 아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견뎠다. 그 아들을 업고 떠난 6·25 피란길에서 맞은 어느 아침. 아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전쟁 뒤 이 집 저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할머니는 두 번 재가(再嫁)했지만, 결국 외로운 식모살이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내 육신은 도움 없이 살 수 없었지만 출생신고가 늦어진 탓에 나라에서 주는 혜택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했다. 양씨 할머니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한스러운 삶이 다음 달 자서전으로 나온다. 할머니를 대신해 자서전을 쓰고 있는 이는 박주은(17·노원구 혜성여고 3년)양이다. 박양은 지난 석 달간 매주 토요일마다 할머니 집을 찾아 할머니의 인생을 글로 정리해왔다. 박양은 "처음엔 '피란 왔다'고만 하시던 할머니는 차츰 가슴속 응어리진 사연을 들려주셨다"고 했다. 박양이 석 달 만에 탈고한 자서전의 첫 문장은, '재미있을 것 하나 없는 구구절절한 삶이었다'는 것이었다.


노원구 중·고생 12명이 임대아파트에 사는 독거노인 아홉 분의 자서전을 쓰고 있다. 서울 지역 노인 자살자 통계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노원구가 만든 하나의 자살 예방 사업이었다. 허정숙 노원휴먼라이브러리 관장은 "외로운 분들이 손자뻘 학생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위로받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지난 24일까지 총 12번의 주말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간 9명의 자원봉사 학생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인터뷰한 어르신들은 평균 연령 81세로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며 힘들게 살아온 분들이다. 불우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조차 그분들에겐 힘겨운 일이었다. 처음엔 "힘들었다" "아프다" "빨리 하고 가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마음을 읽어내기엔 어리기만 했던 학생들은 준비한 질문지를 다짜고짜 읽었다. "가족들은 어디 계시나요?" "가장 슬펐던 일은요?" 기억을 헤집는 질문에 때론 역정이 돌아왔다. 강모(90) 할머니를 만난 모성윤(17·미래산업과학고 2년)군은 할머니가 "왜 그런 걸 물어!" 하며 화를 내는 바람에 10분 만에 돌아서기도 했다.


3주가 지나도 인터뷰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마음을 여는 게 먼저라는 걸 깨달은 학생들은 아홉 분을 주민센터로 모셔, 손수 만든 마파두부 덮밥을 대접했다. 그날 이후 서로가 한결 편해졌다. 모성윤군은 그다음 방문 땐 시키지도 않은 설거지를 하며 "할머니, 오늘은 뭐 드셨어요?"라며 안부부터 여쭸다. "나 같은 늙은이가 무슨 자서전이냐"던 어르신들의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김진욱(17·수락고 2년)군이 인터뷰했던 정모(77) 할아버지는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줬다. 군가 '전우여 잘 자라'였다. 노래 제목을 묻는 김군에게 할아버지는 열두 살 때 겪은 6·25 이야기를 했다. 인민군 패잔병들을 재워준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누나가 불 지피려고 아궁이 재를 긁어내는데 뭔가 묵직한 게 느껴진 거여." 인민군이 숨겨놓고 간 수류탄과 실탄 다발이었다. "그냥 불 지폈으면 우린 떼죽음당했을 거여." 전쟁을 모르는 김군의 귀에도 소름 끼치는 얘기였다. 최동혁(17·수락고 2년)군이 만난 할머니는 스물여섯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두 딸을 홀로 키웠다. 할머니는 "평생 가슴에 묻은 남편 얘기를 처음 꺼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던 날 최군은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를 복지관까지 모셔다 드리고 꼭 안아드렸다. 할머니는 "책 나오는 것도 좋지만 새로 생긴 손자가 더 좋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학생들은 "처음엔 스펙을 위해 지원했다"고 했다. 박주은양은 "하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의 제 삶이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김민경(17·수락고 2년)양은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40년을 홀로 산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마지막 날 안마를 해주는 민경양에게 할머니는 "마음씨가 고와서 좋은 삶을 살 거야"라고 했다. 김양은 "누구나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퇴고 및 디자인 작업 중인 아홉 편의 자서전은 오는 2월 세상에 나온다. [조선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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